금관가야
가야계 고대국가는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를 중심으로 한 국가로, '금관가야(金官伽倻)' 또는 '가락국(駕洛國)'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에서 구형왕까지 490년 동안 10대의 왕이 있었으며, 김해 김씨 족보에는 11대 말왕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야계는 4세기 중반까지 김해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국으로,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방 정벌로 인해 5세기 초반에 국가의 위세가 쇠퇴한 것으로 보이며, 6세기에는 신라에 흡수되었습니다.
주요한 고분군으로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 있습니다.
이 국가는 일반적으로 '금관 가야'로 불리우지만, 정식 국명은 '가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조 왕건이 통일 이후에 가야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XX 가야'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의 경우 기록에서는 주로 '가야'로 불리며, 이는 그 시기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국가를 가리킵니다. '임나'라는 표현도 존재하지만, 현대에는 임나일본부설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본서기 등에서는 '가라', '남가라', '남만', '수내라', '소내라' 등 다양한 이름으로 언급되지만, 대체로 '가라'와 '남가라' 등의 표현은 금관과 관련이 있으며, '임나'는 변한(가야)의 여러 국가들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금관국'이 초기 금관 가야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원전~1세기 - 구야국의 건국
기원전 1세기 전반, 낙동강 유역은 지석묘와 민무늬 토기를 중심으로 한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금속기 제조 능력이 부족하고 사회조직 수준이 낮았습니다. 중국 전한이 고조선을 침공하고 멸망시킨 후(기원전 108년, 왕검성 전투), 유이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김해를 비롯한 낙동강 유역에서는 유이민 집단이 형성되었고, 목관묘의 조성이 활발해졌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지석묘나 석관묘와 다른 특징을 갖는데, 중국과의 교류로 인해 고조선 계열의 철기류, 세형 동검, 철제 무기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주민과 남하한 유이민이 상호 협력하여 발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구지봉 수로신화에 신화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김해 주촌면의 양동리 고분군이 이 시기의 중요한 증거로 나타났습니다. 양동리 162호 고분과 235호 고분은 중국제 구리거울과 유리구슬 목걸이, 대량의 철제 무기 등을 포함한 고가의 물품이 발견되어, 이전의 고분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대성동 고분군 이전에는 양동리 고분군이 더 두드러진 시기였습니다. 이것은 구야국의 건국 전기로 여겨질 수 있으며, 건국신화에 나오는 구지봉 수로신화는 이러한 상황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부 학자는 창원 다호리 고분군의 쇠퇴와 양동리 고분군의 성장 시기가 유사하다고 주장하여, 구야국의 정치체가 창원 다호리에서 양동리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심지 이동설은 여전히 논란이 많습니다. 특히 창원 다호리와의 관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구야국의 건국시기와 관련된 학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이러한 이론들은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금관가야 성장무렵의 역사적 상황
김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성장을 시작한 지역 중 하나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등장하는 구야국(금관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안라국과 함께 변한(가야) 영역에서 독보적인 세력을 차지했으며, 진지렴(秦支廉)이라는 독자적인 호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다른 소국들과는 차별화된 정체성을 시사하며, 영남지역에서는 함안의 안라국과 함께 두 소국뿐이었습니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통해 김해 지역이 초기에는 사천시 늑도와 창원시 다호리와 경쟁하던 중, 김해 양동리에서 시작하여 대성동을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4세기까지 김해 지역은 낙동강 유역 전체에서 가장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다른 가야 소국들에 비해 지리적으로 우세했으며, 낙동강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입구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삼국지 위지에서는 김해가 변한이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고 한반도 각지, 한사군, 왜국에 판매하는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 군현과의 교역을 통해 선진적이고 규모가 큰 외부 세력과 교역하는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김해는 낙동강과 연안 바닷길을 통해 교역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지점으로서, 왜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김해 지역에서 출토된 왜계 하지키 토기와 김해 가야토기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사례로 확인됩니다.
김해 지역은 다른 가야 소국들과는 달리 초기에 성장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해 금관국은 주변 소국을 정복하며 팽창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변 국가와의 전쟁에서 경주의 신라와 함께 활약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4세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부산을 아우르며 교역 이익을 토대로 급성장했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금관국이 안야국과 함께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왜인전에서는 한반도 북서쪽의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중요한 지리
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김해 지역이 국제 정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삼국시대를 통틀어 김해의 역사적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꼽힙니다.
김해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독자적인 성장을 이루어낸 지역 중 하나로, 금관국이라는 소국을 건설하며 주변 소국들과 교역하고 싸워왔습니다. 지리적 이점과 국제 교역으로 발전한 김해는 안라국과 함께 낙동강 유역에서 독보적인 세력을 확보했으며, 특히 왜인전에서의 역할을 통해 김해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김해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그 유물과 유적을 통해 삼국시대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과 김해의 운명
399년, 광개토대왕은 신라로부터 왜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5만 원군을 동원하여 신라와 함께 전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도주하는 왜군이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렀다고 전해졌습니다. 이후 400년, 광개토대왕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이 지역이 전쟁터가 된 '임나가라'를 쓸어버리며 김해의 운명이 크게 휘청거리게 되었습니다.
전투 결과, 김해 금관국은 신라에게 패배하고 맹주 지위를 빼앗기며 크게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김해는 반파국(대가야)에 맹주 지위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전통적인 통설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조사도 김해 지방 무덤의 부장품을 통해 400년 시점에 크게 쇠퇴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남정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들이 대립 중입니다. 몇 가지 주장으로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종발성'을 낙동강 동쪽의 한 거점으로 보아 가야 지역에 큰 피해를 주지 않았거나, 심지어는 항복하여 큰 싸움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부산대학교 신경철과 경북대학교 주보돈은 이 남정에 대한 다양한 설을 세우고 대립하며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위시한 금관가야의 성장과정을 중점으로 다루며 광개토대왕의 400년 남정이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마구 문화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른 관점에서는 가야사와 초기 신라사의 관점에서도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400년의 사건을 유의미하다고 보거나,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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