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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해의 건국과 역사적 의미

by 세계 역사 전문가 2024. 2. 4.

발해의 건국과 역사적 의미

발해(渤海)는 대조영이 건국한 동아시아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대에 위치한 고대국가로, 국호는 주로 발해로 알려져 있지만 대일본 외교 문서에서는 고려(高麗)를 자칭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특징과 역사적 위치에 대해 다루어보겠다.

한국 고대사에서 8~9세기 남방의 신라와 함께 200여 년간 이른바 '남북국시대'의 중심을 이뤘다. 발해는 영토와 면적 면에서 한국사의 역대 국가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계승을 주장한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247년간 존속했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926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발해'라는 국호는 당과의 외교에서 사용된 호칭에서 비롯되었다. 발해군왕이라는 호칭은 대략 현재의 창저우시 일대를 가리키며, 당과의 관계에서 이 지역이 바다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군'이라고 불린 것이다. 거란에서는 '단 구르' 혹은 '모시 구르'로 불렀으며, 이 중 '단 구르'라는 국명이 동단국의 어원이 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발해의 군주는 '가독부(可毒夫)'라는 고유어로 불렸다. 그러나 정혜공주묘비에는 '황상'이라는 표현과 '황후'를 사용한 묘비도 존재하여, 외왕내제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왕'이라는 표현도 나오지만, 발해 군주의 칭호가 모두 황제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발해는 남북국시대의 중심 국가로써 한반도 북부와 주변 지역에 걸쳐 큰 국력을 자랑했다.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국호와 어원은 당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발해의 군주와 국호는 그 특유의 역사와 의미를 지니고 있어, 한국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발해의 정치제도

발해는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3성 6부제와 주자감(胄子監)을 도입한 고대 국가로, 그 독자성을 강조하며 발전한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발해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정치체제를 형성했으며, 제3대 문왕 대흠무 때에는 3성 6부제와 주자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단순히 당나라의 제도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명칭과 기능에서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변형시켰다.

발해의 중앙 관제는 정당성(政堂省),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서는 정당성을 중심으로 둔 이원적인 조직 구조를 갖추었다. 또한 지방제도로 5경 15부 62주를 완성시킴으로써 지방 행정을 강화하였다.

6부는 충, 인, 의, 지, 예, 신부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는 유교적 명칭을 채택하면서도 발해만의 특색을 부여하였다. 충부는 인사관서, 인부는 재무 행정, 의부는 의례와 대외관계 주관, 지부는 군사행정, 예부는 법률 기구, 신부는 행정 부서를 담당하였다.

중정대는 발해의 감찰 기구로서 수장인 대중정(大中正)과 소정(少正)이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7시는 중앙부서로, 생활과 종교, 국제 관계 등을 담당하는 전중시, 종속시,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등으로 나뉘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발해의 정치체제는 당나라를 모방하면서도 독자성을 유지하며 발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동안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왕권을 안정시킨 발해는 중앙과 지방, 감찰 기구 등 다양한 부문에서 효과적인 행정 체계를 구축하여 한반도 역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발해의 사회구조

발해의 사회구조는 다양한 족성과 계급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귀족과 일반민중, 노비 등 각 계층 간의 상호작용이 존재했다. 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고 있어, 기존의 편견을 깨고 발해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발해의 귀족은 대씨를 중심으로 고씨, 장씨, 양씨, 두씨, 오씨, 이씨 등 여섯 우성망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귀족은 외교, 군사,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발해의 역사 동안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49개의 일반귀족도 존재하여 발해의 사회는 고구려계, 말갈계, 중국계, 신라계 등 다양한 출신의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여계로는 하, 왕, 임, 해, 수, 율, 배, 박, 최 등이 존재하였다. 또한 왕비족으로는 왕후인 순목황후의 성씨인 태씨와 무왕 시기에 등장하는 임아가 왕의 장인으로 추정되는 임씨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발해의 귀족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평민인 편호는 국가호적에 편입된 평민으로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였다.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평민들은 부세, 요역, 병역 등을 담당하며 발해의 경제와 생산에 기여했다.

부곡민은 평민과 노비 사이에서 신분이 낮았지만 주인과의 예속관계가 비교적 강한 농노 계층에 가까웠다. 노비는 가장 낮은 신분으로 착취와 압박을 많이 받았으며, 부곡민과 노비는 발해의 사회에서 하위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발해의 사회는 다양한 출신과 계급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귀족, 평민, 부곡민, 노비 등 각 계층 간의 상호작용이 발생하면서 발해의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 새로운 시각을 통해 발해의 사회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역사적인 편견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발해의 군사 제도

발해의 군사 제도는 당의 군사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각 군사 조직의 역할과 운영 원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족하다. 현재까지의 연구에서는 발해의 군대가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위, 남우위, 북좌위, 북우위로 이뤄진 10위설과 남좌우위, 북좌우위를 각각 하나로 본 8위제로 나뉘어진다.

군사 조직은 맹분위, 웅위, 비위가 궁성의 숙위를 담당하고, 좌우위가 각각 남위금병, 북위금병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대장군, 장군, 소장, 낭장, 장사, 병조참군사, 교위 등 다양한 지휘관이 각 위에 배치되었다.

각 지방에는 수령을 지휘관으로 두고 촌락민들을 병사로 징집하는 군사 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촌락을 단위로 조직되어 지방의 안전과 군사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구려에 비해 병력 동원력은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왕 시기에 최대 3만 명 이상을 동원하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고구려나 백제와는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주변 역사적 맥락과 함께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발해의 군사 제도는 당나라를 모방하면서도 독자적인 특징을 가졌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의 한계로 인해 정확한 군사 제도와 운영에 대한 이해는 제한적이지만, 다양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발견과 해석을 통해 발해의 군사 역사를 더 깊이 파헤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발해의 지리와 영토 확장

발해의 초기 영토는 흑수의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사모부, 군리부, 굴설부, 막예개부, 불열, 우루, 월희, 철리 등 다양한 부족들이 살았다. 이 지역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하며, 서쪽으로는 실위에 이른다.

발해의 정확한 국경은 여러 연구자들 간에 논란이 있으며, 지리적인 특성과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현대에는 중국 학계에서는 발해의 동북이 더 넓게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발해를 당나라의 도독부 정도로 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과 일본은 발해의 영토를 두고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발해의 요동 지배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평양의 지위와 국적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평양이 발해의 지배하에 있었는지, 신라의 영향 아래에 있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평양이 발해의 영토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평양이 신라에 속해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발견은 발해의 북방 영토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고분군의 위치가 예상과 다르게 북쪽에 있어, 발해의 영토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발해는 서아무르 유역까지 진출했다는 주장도 있어, 영토 확장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발해의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현재까지 발해에 대한 기록과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역사 귀속 문제는 큰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발해를 한국의 일부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지만, 해외학계에서는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특히 중국의 입장에서는 발해를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하려는 동북공정이 진행 중이며, 이로 인해 발해에 대한 국가 인식이 갈릴 수 있습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발해의 표기가 한국어 발음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자 표기와 중국어 발음이 함께 병기되기도 합니다. 이는 편집 가능한 환경에서 중국 사용자들이 참여하는 영향으로, 발해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입장 차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정전쟁은 발해의 정체성과 역사적 위치를 놓고 다양한 입장이 충돌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중국에서는 현재까지도 발해를 고구려와 함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나 말갈족의 나라로 주장하며, 이로 인해 발해와 고구려 성곽을 만리장성의 일부로 여기는 입장도 있습니다. 또한, 당나라 황궁인 함원전보보다 큰 상경성 제2궁전이 있다는 주장도 중국에서 비공개로 보수 작업 중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발해 유적지 답사를 중국에 비해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북한에서도 중국과의 교류가 제한되는 실정입니다. 러시아는 발해를 자국의 퉁구스족과 연관지어 퉁구스족의 최초 국가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발해에 대한 인식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발해의 역사귀속과 계승인식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입니다. 국내외의 다양한 입장과 국가 간의 차이로 발생하는 수정전쟁은 발해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연구와 발견을 통해 발해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며, 다양한 관점을 수렴하여 토론과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