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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르네상스 탄생과 부흥 그리고 쇠락

by 세계 역사 전문가 2024. 2. 3.

르네상스 문예 부흥과 문화 혁신의 시대

르네상스는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일컫는 용어이다. 현대에는 이 개념이 모호하며 중세와 근대 사이의 전환기일 뿐 독립적인 '르네상스 정신'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암흑시대'를 극복하고 고전 문화를 부흥시켜 '유럽의 문명적 승리'를 이룬 시대로 정의된다.

고전 문화의 복원: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했다. 이는 고전적 예술, 철학, 과학 등에 대한 재평가와 활용을 의미한다.
문예 부흥과 번역:르네상스는 문예 부흥으로 해석되며, '리나시타'라는 이탈리아어 원어에서 '재생'이라는 뜻의 용어를 따온 것이다. 이는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을 상징한다.
인본주의:르네상스는 기독교의 신본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는 인본주의를 추구했다. 이를테면, 르네상스식 인본주의는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을 의미한다.

트레첸토, 콰트로첸토, 친퀘첸토:각 세기별로 이탈리아어로 표현되며, 1300년대를 트레첸토, 1400년대를 콰트로첸토, 1500년대를 친퀘첸토라 한다.
대명사로서의 르네상스:현대에는 큰 문화 프로젝트나 전성기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각 지역에서의 부흥을 나타내어 '카롤루스 르네상스', '수메르 르네상스', '이슬람 르네상스', '티무르 르네상스' 등이 있다. 르네상스는 문화와 예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며, 서유럽의 역사와 인류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개념에 대한 비판

미슐레, 부르크하르트, 페이터는 19세기식 개념으로 르네상스를 정의하며 이를 하나의 정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르네상스의 정의를 통해 15세기 이후의 현상을 19세기 유럽의 이상형으로 설명하며, 제한적 민주주의, 교회에 대한 회의주의, 예술과 문학의 힘, 유럽 문명의 승리와 같은 가치를 찬양했다. 이러한 가치는 19세기 유럽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제리 브로튼은 르네상스를 '근대 초'로 설명하여 19세기적 개념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이 용어는 르네상스를 단순히 19세기 유럽의 이상적 정신이 아니라 역사적 시대로 강조하며, 그린블랫이 저서에 사용한 용어로 채택되었다.

자크 르 고프는 "르네상스란 없다"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여러 르네상스가 있었지만, 이는 고대에서 근대가 완전한 형태를 취한 19세기 중엽까지의 시대적 특징으로 설명된다. 이는 르네상스가 중세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과거에서 찾는 중세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에는 르네상스를 어떤 '정신'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더이상 지지받지 않고 있다. 르네상스는 단순히 '그리스도교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무언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단순한 '근대 초'로 이해된다. 19세기적인 르네상스 정신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허상일 뿐이지만,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이 개념은 교육적인 이유로 전통적인 르네상스상을 설명할 때 사용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르네상스를 '정신'으로 해석하는 19세기식 관점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전제로 이 문서를 읽는 것이 필요하다.

왜 하필 이탈리아인가?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으며, 그 유산이 그리스도교 세계로 편입된 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문화는 오늘날까지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고,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이 복원되었습니다. 또한 동로마 예술가와 학자들이 동로마가 멸망한 후 이탈리아로 피난하여 지식을 전파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중세 유럽에서 봉건제가 발전하지 않은 특이한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고, 교황령의 존재도 이탈리아를 안정적으로 가르는 데 일조했습니다. 이러한 분할된 환경은 르네상스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중세에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고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이로 인해 다양한 문물이 이탈리아로 유입되었고,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어 교양과 문화의 수준을 높였습니다. 특히 상인들은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 수학자들을 후원하여 르네상스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비뇽 유수가 끝나고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교권을 세우고 황폐화된 로마를 재건해야 했습니다. 교황과 다른 경제적 후원자들은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여 이탈리아 각지에서 유명한 르네상스 기술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이고 다양한 예술 작품과 건축물을 재건했습니다.

흑사병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체를 휩쓸었고, 이탈리아는 특히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 사회는 크게 변했습니다. 농부와 노동자들의 사망으로 노동자의 가치가 상승하고, 임금 노동자의 등장으로 귀족의 세력이 약화되며 자본주의가 초기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르네상스의 서막을 열어젖히게 되었습니다.

유독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독보적으로 발전한 이유는 메디치 가문의 존재에 기인합니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을 통해 재력을 축적하고, 예술을 크게 장려하여 전 유럽의 예술가들을 피렌체로 모았습니다. 특히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다양한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원인들이 결합하여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선택되었으며, 특히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의 역할은 르네상스의 창조적인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빈부격차와 경제의 부흥

이탈리아는 1300년대에 남북 간의 빈부 격차가 크게 드러나는 상태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중심이었던 라티움과 남부 지방은 북부에 비해 가난했으며, 로마는 폐허로 가득한 유적 도시로 전락했습니다. 교황은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는 굴욕을 겪었고, 남쪽의 시칠리아도 교역 주도권을 빼앗기며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면에 북부 도시들은 경제적인 활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과 아랍 등지와의 거래를 통해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부상했습니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등 항구 도시들은 동방의 향신료, 염료, 비단과 같은 특산물을 유럽 전역으로 수출하며 번창했습니다. 특히 베네치아는 거대한 해군을 통해 동방항로를 통제하고, 제노바도 강력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경제적인 번창을 이루었습니다.

내륙 도시들도 농경지에서의 생산과 교역을 통해 부를 창출했습니다. 피렌체와 밀라노는 포 계곡의 비옥한 농지에서 모직 직물 생산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양모, 밀, 귀금속 등을 수출했습니다.

북이탈리아는 동방과 서방을 잇는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를 통해 사실상 독립적인 지역으로 성장했습니다. 복식부기, 합자회사, 금융시스템, 외환 시장, 보험, 정부 부채 등의 경제 개념이 등장하며, 피렌체에서 발행된 '플로린'은 국제 공용화폐로 사용되어 국제금융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상인 계급의 부상과 기존 귀족층의 쇠퇴로 초기적인 자본주의가 형성되었으며, 상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치를 과시하여 경제 활성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1300년대 후반에는 소빙기, 기후변화, 백년 전쟁 등으로 인해 유럽 경제가 침체에 들어갔습니다. 특히 흑사병은 북이탈리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1378년에는 피렌체에서 사회적 혼란과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르네상스의 시작

흑사병의 창궐은 역설적으로도 르네상스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노동력의 가치가 상승하였고,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의 재산을 상속받아 훨씬 부유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고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졌습니다. 15세기 초 흑사병 사망률이 감소함에 따라 사회는 다시 안정세로 돌아가면서 경제에 활기가 돌았습니다. 이로써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났고, 이는 장인 계급과 상인 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의 붕괴로 메디치 가문이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문학과 사상의 부활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을 서유럽으로 가져와서 그 문학적 유산을 다시 살려냈습니다. 수 백년 동안 잊혀져 있던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이 다시 서유럽에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도 르네상스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밀라노와 피렌체의 잔인한 전쟁은 공화주의적 이상과 함께 르네상스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피렌체는 1406년 피사를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베네치아는 해상에서의 패권을 굳히며 이탈리아 도시들 간의 교통 정리에 일조했습니다. 도시들 간의 경쟁과 전쟁은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성장을 견인하였습니다.

이렇게 흑사병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전쟁이 르네상스의 발전에 역설적으로 기여하면서, 이 시기는 단테 알리기에리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등의 활동으로 르네상스의 첫 물결을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르네상스는 고대의 지식을 되찾고, 예술과 문화가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갔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르네상스

피렌체의 역사에서 1300년대 후반까지 알비치 가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은행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이 무대에 등장하며 힘을 쌓았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교황청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가문의 세력을 강화했습니다. 그의 손자인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는 메디치 은행을 유럽 최대 규모로 성장시키며 알비치 가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1433년 알비치 가문을 물리치고 피렌체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300년 동안 피렌체의 대표적인 지배 가문으로 솟아나며 르네상스 시기를 주도했습니다. 피렌체는 유럽 상품 무역로를 장악하여 중요한 도시로 자리매김하였고, 메디치 가문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투자를 통해 피렌체를 유럽 최고의 문화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코시모가 사망하자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가 메디치 가문을 이어받았지만 5년 만에 사망하여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피렌체를 지배했습니다. 로렌초는 "대인 로렌초"로 불릴 정도로 예술과 문화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을 지녔습니다. 피렌체의 100인 위원회를 조직하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하였으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업적인 면에서는 코시모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메디치 은행은 서서히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로렌초는 교황과의 관계에서는 약화되었지만 밀라노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교황과의 갈등으로 교황이 암살을 시도하고 로렌초의 남동생이 희생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로렌초는 교황과의 전쟁을 일으켜 메디치의 피렌체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이처럼 예술과 정치, 금융 분야에서 거둔 성취를 통해 르네상스 시기의 중심에 자리하며 유럽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르네상스의 확산과 변화

피렌체를 중심으로 시작된 르네상스는 시에나, 루카 등 토스카나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문화는 곧 북이탈리아 전역으로 번져가며, 토스카나 방언은 문학 분야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밀라노도 1447년에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권력을 잡은 후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스포르차 가문은 메디치 가문과 유사하게 예술에 투자하며 르네상스를 키워나가고,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같은 최고의 예술가를 끌어들였습니다.

아드리아 해를 장악한 베네치아도 르네상스의 흐름에 빨리 참여했습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는 번영을 누리며 주변 도시들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로써 베네치아는 독자적인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페라라, 만토바, 우르비노 등 다른 도시들도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파급 효과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알폰소 5세가 나폴리를 정복하면서 남부 일대에서도 르네상스가 발전했습니다. 알폰소 5세는 당대의 유행에 따라 예술가들과 인문주의 학자들을 후원하여 나폴리 르네상스를 이끌었습니다.

로마는 초기에는 폐허 유적 도시에 가까웠지만, 1447년 니콜라오 5세의 즉위를 통해 로마 르네상스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교황들이 메디치 가문과 보르지아 가문의 영향을 받아 로마를 아름다운 르네상스 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와 같은 인문주의 학자들의 활동을 통해 로마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났습니다.

르네상스가 전 이탈리아로 확산되면서 예술의 성격도 변화했습니다. 초기에는 무명하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주도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배 계급과 귀족들이 르네상스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특히 도시의 상인 계급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르네상스 예술의 금전적 지원을 담당했습니다. 그 결과 예술은 사회 권력층의 영향을 받아 귀족적, 세속적인 측면이 강조되었습니다.

또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만 영향을 끼쳤습니다. 농부와 하류층은 일상 생활에 르네상스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않았고, 농촌 지역은 여전히 중세적인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이에 비해 도시는 귀족과 상인 계급의 지배를 받아 르네상스의 발전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빈곤층은 르네상스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15세기까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문화와 부의 과시를 통해 자존심 경쟁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백년전쟁 등으로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던 시기에는 비교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군사적 활동과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의 등장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외세의 강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의 충돌은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수아 1세가 패배하면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영토로 빠지게 되었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내에서 자주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벌이게 됩니다.

1527년의 사코 디 로마 전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결을 야기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교황이 피난을 가야할 정도로 로마가 파괴되었고, 르네상스풍 건물들도 피해를 입어 현재로서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코 디 로마는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독립을 끝내고 외세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코 디 로마 이후 이탈리아는 외세의 지배에 놓이며 부의 고갈과 문화적 생명력의 상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는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3류 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유럽 각국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다양한 토양에서 발전하며 각국의 문화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군사적 위기와 외세의 침입으로 인해 쇠퇴하게 되었지만, 그 유산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 유럽 문화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쇠락은 유럽 역사에서의 한 장면에 불과하며, 르네상스의 정신과 예술은 계속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