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한반도의 역사적 유산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동안 25대 472년 동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천재지변 등에 관한 종합적인 기록을 수록한 대한민국의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 실록은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과 함께 국보명으론 기타산엽본으로 총 2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 다방면의 자료 수록: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천재지변 등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를 수록하여 한반도의 다양한 역사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높은 가치가 있다.
- 역사적 공정성: 왜곡이나 탈락이 없이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다른 실록들과 비교하여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이는 조선시대 원본이 남아 있기 때문으로, 일본, 중국, 월남의 실록들이 당대 원본이 소실되어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는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편찬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 사초 및 시정기 작성: 왕의 행동을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해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일상적인 행동을 담은 기록물인 사초를 만들었다. 또한, 사관들은 3년마다 자신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를 작성하여 보관했다.
- 초초 및 중초 작성: 사초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를 작성하였고, 각 방에서 작성한 초초본을 편집해 중초를 작성했다.
- 정초 작성: 실록청의 수장과 도청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를 작성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완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종합적인 자료 수록: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하여 국보로 지정되었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남아 있다.
- 원칙적인 편찬 방식: 조선왕조실록은 편찬 시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로 편찬되었으며, 완성된 실록은 복사본을 만들어 지방에 보관하여 역사적 공정성을 보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한반도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편찬 방식과 내용의 충실성은 세계적으로도 귀중한 역사적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초(洗草): 실록 편찬의 마무리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완성된 실록을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과정은 편찬된 기록의 '쫑파티'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세초식 장면은 종종 그림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세초가 행해지는 장소는 현재도 남아 있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의 '세검정'입니다. 세초 후에는 세초연이라는 잔치를 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물자 절약: 조선 왕조는 검소한 정부 운영으로 유명했으며, 종이 등의 자원을 아끼기 위해 세초가 시행되었습니다. 종이는 귀한 자원으로 여겨져 왕조의 지출로써 큰 부담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한지는 제작이 어려워 대량으로 생산되지 않았고 고급지 종이는 더욱 귀하였습니다.
- 사초 기록의 자율성 보장: 사초는 사관의 생각이 여과없이 기록된 경우가 많아 화를 입거나 정쟁을 유발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세초를 통해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진 정초본과는 달리 사초는 여러 상황에 대한 사관의 생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초를 통해 사초와 중초를 제거함으로써 정치적인 갈등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 물자 절약을 위해: 종이의 아낌없는 사용을 막기 위해, 사용된 종이를 세초과정을 통해 재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종이를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로 씻어 먹물을 빼낸 뒤 잘 말리면 다시 사용 가능했습니다.
- 사초 기록의 자율성 보장을 위해: 세초를 통해 초초와 중초를 없애는 것은 사초에 기록된 내용이 공개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특히,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발생하면서 사초의 내용이 공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연산군 이후에는 세초를 의무로 규정하여 이전에 세초하지 않고 남겨둔 사초까지 모두 씻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세초로 인해 어마어마한 양의 초초와 중초, 생생한 현장 자료들이 사라지면서 역사학자들은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 초기의 기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거의 증발했기 때문에 이 기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단, 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어 광해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조 내에서 사초와 실록을 열람하는 것을 금기로 여겨져왔기 때문에 세초로 인해 많은 중요 자료들이 소실된 측면이 있습니다.
보관, 그리고 수난: 조선왕조실록의 운명
과거 컴퓨터나 소규모 기억장치가 없던 시절에도 기록물의 보존을 위해 백업은 철저히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고려실록에서 나온 교훈을 바탕으로 궁궐과 해인사에 각각 1부를 보관하여 소실을 대비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왕조 기록물의 안전한 보존을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채택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하고, 한양의 춘추관에 한 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했습니다. 이를 위해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작업인 '포쇄'를 실시하여 곰팡이와 좀의 발생을 방지했습니다.
그러나 지방의 세 곳에 사고를 두는 것에 대해 대사헌 양성지는 이의를 제기하며 권고사항을 제시했습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권고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세조 12년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하여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중종 33년에는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하여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임진왜란이나 전주 사고본 제외의 모든 본이 불타버리는 등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하였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은 모두가 보존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문종실록 편찬 시에 전주 사고본의 일부가 사라지면서 문종실록 제11권은 소멸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현재 남한에는 사고본 2종, 북한에는 1종이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근대적인 보존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실록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했고, 서울대 도서관의 일부 본은 군용 트럭으로 수송되어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상남도청 창고 등에 보관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실록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부산의 국가기록원 등에서 보존 및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종 논란과 역사적 이슈가 뒤따랐지만,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현재의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보관과 수난의 역사
과거에는 컴퓨터나 소규모 기억장치가 없던 시절에도 기록물의 보존을 위해 백업이 중요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궁궐과 해인사에 각각 1부를 보관하여 소실을 대비한 것은 그 예시입니다.
왕조 실록이 완성되면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하고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존하는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포쇄' 작업을 통해 곰팡이와 좀의 발생을 방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고본을 지방에 보관하는 결정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세조 12년에는 성주 사고로 모든 본이 소실되었으며, 이후 전쟁과 재난으로도 많은 소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모두가 보존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문종실록 제11권은 전주 사고본의 일부 소실로 소멸되었습니다. 현재 남한에는 사고본 2종, 북한에는 1종이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근대적인 보존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6·25 전쟁 시 서울의 실록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현재까지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실록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부산의 국가기록원 등에서 보존 및 전시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보존을 위한 다양한 노력과 어려움을 겪으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소실된 부분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역사의 흔적과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에서 역사를 수찬하는 자의 한계
조선왕조실록은 역대에서 역사를 수찬하는 데에 사용되었으나, 이를 편찬한 사람들의 주관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역대의 기거주(起居注)와 여러 사서(史書)의 기록을 근거로 하더라도 오해와 오류가 존재하였고, 이는 특히 강목(綱目)에 기재된 고증(考證)·집람(集覽)·집람정오(集覽正誤)의 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이 주관적이고 오류가 많았기 때문에, 수정실록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수정실록은 새로운 평가와 내용을 담아 쓰더라도 이전 내용을 보존하면서 후대에게 남겨두었습니다.
새롭게 편찬된 실록이라 하더라도, 이전 내용과 바꾼 내용을 고스란히 남겨두었던 것은 주관적인 수정 작업의 결과로 인해 실록을 없애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고자 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에서 나온 주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체에 따라 승자에게 유리한 기록이 부풀려지거나 패자에게는 억울한 기록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수정 작업 역시 새로운 편찬자의 주관과 편견이 반영되기 마련이었습니다. 특히 붕당 정치의 격화로 평가가 크게 오가는 경우, 수정 작업에서도 해당 내용에 대한 주관이 반영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적인 평가와 판단의 여지가 많은 문서입니다. 기록이 수정되더라도 이전 내용을 보존하고 후대에게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합니다. 역사학자들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록을 분석하고 수정 작업에 대한 주관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관의 촌평과 역사적 판단
사관은 도적 성행이 늘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재상들의 탐오와 수령의 가렴주구 부족이 도적의 성행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수령이 백성을 섬기지 않고 도적짓을 허용하면서 백성은 고통 받고, 그로 인해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 길이 없는 상황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관은 현 시대에도 공감을 일으키는 비판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대신과 관리들의 부정행위로 임꺽정과 같은 선량한 사람이 나오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정의로운 수령과 청렴한 재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관은 여성의 절개와 그에 따른 문제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성이 절개를 잃으면 가족과의 의리가 끊기고,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도 가풍을 더럽힐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여성의 절개는 가족과 세속적인 연결을 끊음으로써 국가와 우주의 동량에 관여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관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사실과 주관을 명확하게 구분하면서도, 사관의 주관적인 평가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독자가 사실과 주관을 신중하게 판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소로 작용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관의 평가를 해석할 때에는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사관의 주장이 당대의 지식인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의 한계와 고려할 점
조선왕조실록은 중앙집권 국가로서 중앙정부의 시각이 강조되어 있어 지방 기록이 부족하다. 이로 인해 지방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며, 이는 일본의 지역 기록과의 차이를 갖는다.
후대 왕족들이 편찬한 실록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사실관계가 왜곡되거나 생략된 경우가 있다. 특히 당쟁이 격화된 시기에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내용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실록을 해석할 때는 편찬 당시의 정치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주로 사초와 승정원일기, 공문서 등을 편집한 것이므로 이들이 부재하는 경우 해당 내용이 부족하게 된다. 이로 인해 특정 사건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실록은 한양 중심의 중앙정치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이며, 지역에 대한 기록은 소홀할 수 있다. 또한 사회의 미시적인 역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며, 일상적인 변화와 풍습 등에 대한 기록이 한계가 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총독부 주도로 편찬되어 있어 일본에 불리한 사건은 왜곡되거나 생략된 경우가 있다. 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실록 내용의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다.
태조실록은 태조 이성계를 미화하기 위해 신화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태조의 일개 장수 시절의 기록으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부분과 차이가 있다. 태조실록을 읽을 때에는 이러한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수정실록 등 후대 실록은 당파성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하며, 정치적 견해에 치우친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 이를 교차검증 없이 단독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을 해석할 때에는 이러한 한계와 고려할 점들을 인지하고, 다양한 역사 자료와 연구를 통해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사관들의 기록정신과 집념
조선 사관들은 근성 있는 사람들로, 왕의 부끄러운 순간까지 기록하는 데에 집념을 보였다. 태종이 사냥에서 말에서 떨어진 사건조차 왕이 부끄러워하자 "사관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니: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에서.
사관들은 왕의 불쾌한 순간도 정직하게 기록하였다. 왕이 쪽팔린 일이나 욕설을 퍼부을 때에도 과감하게 적었으며, 이는 사관들의 객관적이고 정직한 기록 정신을 나타낸다.
일부 사관들은 왕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태종 때 사관 민인생은 연회 때 왕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숨어 있거나, 평범한 연회에 초대받지 않고 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과 근성은 사관들의 열성과 전문성을 보여준다.
사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까지 기록해야 했다. 왕이 사관들의 부실한 근태 관리나 불만사항에 대한 논의를 기록하는 등, 왕의 불리한 부분까지 정직하게 기록한 것은 실록의 객관성을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조선 후기 당쟁으로 인해 집권당이 바뀌어도 이전 집권당에 유리하게 기록된 기존 실록을 없애지 않고 보존하면서 자신의 당에게 유리한 내용을 수정실록 등으로 다시 편찬한 것은 실록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강조하는 행위로 평가된다.
물론 사관들도 사람으로서 편파적인 평가나 곡필의 의심이 있었지만, 실록은 그런 편파서술이나 곡필을 압도적인 사실 서술로 극복해버리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사관들의 객관성과 편파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더라도, 실록은 전체적으로 중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며 풍부한 기록을 제공하였다.
조선 시대의 사관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정직한 기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우리에게 다양하고 풍부한 역사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사관들의 집념과 기록정신은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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