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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사기, 고려 시대의 오래된 역사 기록

by 세계 역사 전문가 2024. 2. 1.

역사서 《삼국사기》 고려 시대의 오래된 역사 기록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국내 사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현존하는 삼국시대 관련 사료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아 삼국시대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로 여겨집니다.

고려 인종이 하명하여 국가적으로 지원하에 김부식을 비롯한 11명의 편찬자들이 1145년에 편찬하였습니다. 이 책은 기전체 형식을 따르고, 총 50권 9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기>, <연표>, <지>, <열전> 등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라 12권, 고구려 10권, 백제 6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 이름은 《'삼국'사기》이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의 약 260여 년 역사를 다룹니다.
  • 김부식이 편찬한 것으로, 당시 고려인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 칭제건원과 서경천도운동에 반대하고, 묘청 일파를 숙청한 김부식이 집필한 책으로, 비판과 감정이 교차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 중국 사서를 다수 인용하여 작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국내 사료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입니다. 현대에 남아있는 《삼국사기》 원본은 없지만, 중국 사서의 내용을 참고하여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삼국사기》는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무료로 검색 및 열람이 가능합니다. 다양한 온라인 열람 서비스를 통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1.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입니다.
  2. KRPia: KRPia는 온라인 열람 서비스로, 원문에 가까운 내용을 제공하며 강력한 검색 기능과 이병도의 주석으로 우수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유료 서비스이므로 감안해야 합니다.
  3. 네이버-원문으로 보는 삼국사기: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로,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번역한 《삼국사기》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접근성과 편의성 면에서 다른 서비스보다 일반인들에게 더 적합합니다.

《삼국사기》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97년에 간행한 5권의 《역주 삼국사기》는 권위 있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2년에는 개정판이 출간되어 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전체 5권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비용이 필요합니다.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상고사학회'에서 펴낸 《삼국사기》는 대륙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또한, 봉의고등학교의 영어교사 이병곤이 전체를 영어로 번역한 《The History of Three Kingdoms》도 존재하며, 이는 전체 번역본 중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번역본과 서비스를 통해 누구나 쉽게 역사적 유물인 《삼국사기》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역사적 가치

비록 몇몇 부분에서 불분명하거나 비판받을 수 있지만, 《삼국사기》는 한국사를 다룰 때 궁극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제대로 인정받는 한민족 최고의 정사(正史)로 꼽힌다.

비교적으로 불완전한 부분이 있더라도, 《삼국사기》는 기록의 풍부함과 정확성에서 독보적이다. 그에 반해, 《삼국유사》는 이전 사서에서 누락된 내용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으며, 상당수 누락된 설화와 불교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도 《삼국사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삼국시대를 다루는 유일한 사서로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간의 충돌 기록이나 율령 반포, 불교 수용과 같은 중요 사건들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시대 국왕들의 시호, 이름, 가계 등도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고대 한국의 역사를 상세히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라 금석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모즉지 매금왕, 모즉지태왕, 성법흥대왕과 같은 왕들의 시호는 《삼국사기》 덕분에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존재로 한국은 세계사에서 고대사 기록이 많은 나라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중동, 이집트, 중국, 그리스, 로마와 같은 인류 문명의 요람들과 비교할 때, 《삼국사기》의 기록 덕분에 한국은 세계사로 넓히면 굉장히 많은 고대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의 역사적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이름의 유래와 논란

《삼국사기》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를 따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원래의 이름은 《삼국사》였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삼국사기》라는 이름이 굳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1. 명칭 변화의 가능성: 몇몇 주장에 따르면, 《삼국사》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의 역사'라는 일반명사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주장된다. 그러나 이는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 혼동 가능성: '삼국사'라는 명칭은 이전에 편찬된 《구삼국사》나 《해동삼국사》와 혼동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삼국사기》라는 명칭이 가독성 면에서 훨씬 편리하고 명확하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3. 학계의 입장: 학계에서는 《삼국사》라는 명칭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사용하는 것이 가독성과 구분 편의 등의 이유로 선택되었다. 또한, 일제가 《삼국사기》라는 명칭을 밀었다는 주장에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4. 기술적 오류와 비판: 이와 관련하여 기사의 주장이 학계에서는 공인되지 않았으며, 기술적 오류와 비판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동문선》(1478)에서는 <진삼국사표>가 아닌 <진삼국사기표>라는 명칭이 사용되었고, 《삼국사기》 본문에도 스스로 '《삼국사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사》라는 명칭이 아니라 《삼국사기》라는 명칭이 정식 명칭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통해 학계에서의 사용이 정당화되고 있다. 또한, 공식적인 명칭과 편의상 쓰이는 약칭이 의미 전달에 큰 차이가 없다면, 오히려 약칭이 널리 쓰이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현대에는 김부식이 직접 집필한 《삼국사기》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후대에 여러 판본들이 남아 있어 이를 통해 그 가치를 전한다. 이 중에서 주목받는 판본들을 살펴보자.

  • 소개: 1573년(선조 6년)에 찍힌 옥산서원본은 《삼국사기》의 총 50권 9책 완질본이다. 일명 옥산서원본으로 불리며, 경주부에서 찍혀 영남의 양대 서원으로 위상을 떨친다.
  • 상태와 중요성: 글자 크기 등 인쇄 상태가 깨끗하지 않지만, 현재의 《삼국사기》 내용은 이 옥산서원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1970년 도난 사건을 계기로 보물로 지정되었고, 2018년 2월 22일에는 국보로 승격되었다.
  • 소개: 국보 제322-1호는 1573년(선조 6년)에 경주부에서 인출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진 것으로, 3종의 판(板)이 종류별로 섞여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총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이며, 인출상태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 포함된 정보: 1573년 당시의 유통경로, 사용된 종이와 장정(裝幀) 양식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학술 동향과 목판인쇄 사정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 소개: 정덕본은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경주부에서 간행된 총 50권 9책 완질본이다. 이는 경주부에서 처음 개각된 것으로, 발문에 따르면 1394년에 처음 개각된 것이 상당 부분 손상되어 120년 만에 다시 개각한 것이다.
  • 판본의 가치: 닳아서 복구할 수 없는 부분이나 결점이 있지만, 현존하는 완질본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옥산서원본과 함께 현존하는 둘 뿐인 완질본으로서, 2018년 2월 22일에는 국보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판본들은 각자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우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 목적의 복잡한 뒷이야기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그 편찬자의 시각과 의도가 엿보이는 특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목적은 여러 측면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특히 신라와 고려에 대한 편찬자의 입장이 돋보인다.

  • 고려 중심의 역사 재정비: 《삼국사기》는 당시 편찬자들이 소속된 고려의 시점에서 삼국시대 역사를 재정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고려의 영토 대부분이 위치한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던 국가인 삼한과 관련하여, 신라의 지분이 크다고 강조하며, 삼한을 아우른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고 정통성 있는 국가로서의 역사를 강조한다.
  • 김부식의 편찬 의도: 김부식은 신라를 고려에 대한 본적인 요소로 삼아, 경순왕을 통해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는 현실적인 정치적 이해와 함께, 김부식 자신의 역사적 시각과 편향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 신라의 몰락과 김부식의 평가: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신라의 몰락을 예언하고, 이를 신라 왕족들의 흉악한 행동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특히 궁예와 견훤에 대한 비판은 그의 시각이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준다.
  • 기이편의 후백제견훤조와 김부식의 대립: 《삼국유사》에서는 김부식의 역사적 시각과 달리, 후백제견훤조를 통해 후백제와 견훤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편찬자의 입장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는 차이를 보여주며, 김부식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 가락국기조와 고려 중심의 역사 해석: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는 신라와 고려의 관계를 중국의 제후왕과 중앙 왕조의 고사에 비유하며, 김부식이 고려 중심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발을 보여준다. 편찬자는 김부식의 고려 중심적 서술을 비판하고자 하며, 신라의 공덕을 강조하여 김부식의 시각을 반박한다.
  • 기이편에서의 편찬자의 의도: 《삼국유사》의 후백제견훤조 등은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고기류의 정보를 제시하는 데 주안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가 어떤 정보를 선택하고 배제했는지, 그리고 편찬자들의 의도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서, 편찬자들의 역사관, 정치적 입장, 지역 감정 등이 깊게 녹아있는 작품으로서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편찬 의도 해석

  • 《구삼국사》의 영향: 《구삼국사》는 고려 초기에 편찬된 작품으로,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정설에 따르면 김부식이 의도적으로 고구려와 관련된 기록을 빼놓은 것은 아니다.
  • 구삼국사 부족의 확인: 남아 있는 구삼국사의 기록인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은 《삼국사기》 동명성왕본기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오히려 세세한 업적은 《삼국사기》에 더 많이 기록되어 있어, 김부식의 편찬은 단순히 고구려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을 담은 것으로 나타난다.
  • 통일 시점의 역사 관점: 통일 시기에는 다원적 천하관이 자리잡았고, 고려는 해동천하를 내세우며 황제국을 표방했다. 이로 인해 삼국을 동등한 위치의 국가로 다루고자 했으며, 세가(世家)가 아닌 본기(本紀)로 삼국의 역사를 다루었다. 이는 중앙집권국가로 시작하고 전성기를 제일 늦게 맞이한 신라가 제일 먼저 건국했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 삼국의 동등한 취급: 김부식은 신라, 고구려, 백제를 동등한 위치의 국가로 취급했다. 만일 신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면, 신라만이 본기가 되고 고구려와 백제는 세가에 따로 넣었을 것이다. 이는 김부식이 합리적 유교 사관에 입각하여 삼국의 이상과 현실을 적절히 타협하여 서술했음을 시사한다.
  • 평가의 중립성: 《삼국사기》에는 김부식 등 편찬자들의 직접 평가인 사론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신라본기의 사론 10개가 모두 신라의 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중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는 김부식이 합리적 유교 사관을 기반으로 신라의 단점을 지적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 신라 건국 시기의 긍정적 평가: 최근에는 신라 건국 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신라가 늦게 발전한 것은 진한과 진국의 영향으로 보고, 신라가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경상도에 최종 정착했다는 주장과 함께 제시된다. 김부식은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여 신라를 중요한 역사적 위치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부식의 편찬 의도는 신라를 우선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삼국을 동등한 국가로 취급하면서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역사 서술을 펼치는 데 있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합리주의적인 역사관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 시 사료의 한계

  •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직관이 오래되고 기록이 없어서 고기와 중국 사서에 나타난 것만 기록한다"고 밝혔습니다.
  •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제례와 의복제도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중국 역사와 고기를 참고하여 기록했습니다.
  • 김부식은 신라에 대해서도 "신라는 연대가 오래 되었으며 문헌과 사서들이 사라져서 그 제도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며, 특히나 여요전쟁으로 인한 손실로 신라 관련 자료가 한층 더 감소했습니다.
  • 《삼국사기》 편찬 당시 사료가 극도로 부족하여 김부식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 7세기 이전의 자료 부재로 인해 김부식은 애써도 모호한 부분을 파악하기 어려워, 실제로 당시 역사인들도 혼동과 삽질을 하였습니다.
  • 《삼국사기》 편찬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졌지만, 당시에도 이미 다양한 자료가 소실되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 고려시대에는 전대 왕조에 대한 정사를 편찬하는 시기가 늦게 시작되어 부족한 역사 기록이 형성되었습니다.
  • 김부식과 다른 편찬자들은 사료 부족으로 인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김부식은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역사 서술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 신라, 고구려, 백제를 동등한 국가로 취급하며, 김부식의 중립성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합리주의적인 역사관을 반영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어려운 상황과 부족한 사료로 인해 김부식은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이로 인해 삼국사기에는 어느 정도의 부족한 자료로 인한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김부식의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역사 서술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 불신설

'삼국사기'는 삼국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중요한 역사서로 평가되지만, 여러 문제점으로 불신을 받고 있다. 특히, 태조대왕을 비롯한 삼국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길게 나타나는 문제 등이 지적되어 왔다. 이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왕들의 나이와 재위 기간에 대한 기록이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몇몇 왕은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나이로 기록되어 있으며, 출생 전부터 활동한 것으로 기술된 인물도 등장한다. 김부식이 인용한 원사료의 문제와 함께 고려 시대에 편찬된 것이라는 점에서 초기 기록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백제의 경우, 삼국사기에는 적은 기록만이 존재하며, 근초고왕때에 처음으로 글자로 사실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이전에는 기억에 의존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백제사를 미화하기 위해 의도적인 윤색이 가해진 책이 존재할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초기 기록에 대한 불신론은 '삼국지'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특히 2세기에 백제와 신라가 지배한 지역을 무시하고 80개의 소국이 병립된 것으로 묘사된 부분이 문제 삼겨졌다. 풍납토성과 신라의 나정/신궁 유적 발굴을 통해 일부 학설이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초기 기록의 신뢰성 문제는 미해결 상태이다.

삼국사기는 편찬 당시 자료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작성되었다. 각 국가의 기록이 이미 인멸된 상태였고, 중국의 역사서를 참고하여 편찬된 부분도 많았다. 편찬자들은 국가의 역사를 미화하거나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는 등의 주관성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객관성을 찾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 삼국사기를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편찬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궁예의 세부적인 사실을 생략하거나 객관성을 희석한 부분이 있다. 특히 궁예가 고려를 세운 사실은 기록에는 왕을 칭한 사실만 남아 있어서 정통성이 힘들게 되어 있다. 왕건의 역사적 사실도 마찬가지로 편찬 목적에 따라 기록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전과 신라의 토지제도에 대한 기록이 미비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삼국 시대의 토지제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당시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열전에 수록된 듣보잡 인물들의 역시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제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한 불신론이 존재한다. 초기 기록의 부재와 주관성, 편찬 목적 등이 역사적 사실을 흐리게 만들고 있어, 이를 고려한 비판적 시각이 필요하다.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와 더불어 신뢰성 있는 역사 서적을 통해 삼국 시대의 실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